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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세상/▶ 관심집중 화제

볼리비아에서 투표 안 하면 겪는 일

에보 모랄레스 전 대통령의 하야로 혼란 정국에 빠진 볼리비아에서 지난 18일 드디어 대통령선거가 치러졌습니다. 개표가 늦어지고 있지만 모랄레스 전 대통령의 정당이 낸 후보 루이스 아르세의 당선이 유력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선거 후 볼리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면죄부> 혼란입니다. 

 

19일 볼리비아 라파스의 한 주민센터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요. 하도 사람들이 많다 보니 3시간 이상 줄을 서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비단 이곳뿐 아니라 볼리비아 전역에서 주민센터마다 이렇게 북새통을 이뤘다고 해요. 선거도 끝났는데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분이 사실상 당선자로 보이는 루이스 아르세 후보입니다.>

 

다름 아닌 남미의 선거제도 때문입니다. 

 

볼리비아를 비롯한 남미 대다수 국가는 의무투표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선거는 물론이고 국회의원선거, 지방선거에서도 유권자라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투표의 의무가 면제되는 건 병상에 있을 때 또는 지정된 투표소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진 외지에 머물고 있을 때 등 소수의 경우에 불과합니다. 

 

<오전 일찍부터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주민센터 모습니다.>

 

그럼 투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경우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나라마다 내용은 다르지만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볼리비아의 경우엔 3개월간 행정상 <죽은 사람> 취급을 당하게 된다고 하네요. 

 

행정상 죽은 사람? 네~ 맞습니다. 그래서 주민증이나 여권의 재발급 또는 갱신도 못하게 되고요. 심지어 전기요금도 내지 못하게 된다고 해요. 볼리비아는 투표를 안 하면 죽는 나라인 것입니다 ㅎㅎ

 

투표를 하지 않았는데 죽은 사람 취급을 당하지 않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산(?) 사람 취급을 받는 길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주민센터가 발급한 증명서가 있으면 됩니다. 

 

<이 사람은 이러쿵저러쿵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선거 당일 투표를 하지 못했음을 증명합니다>라는 증명서를 주민센터에서 받으면 되는 것이죠. 일종의 면죄부(?)인 셈입니다. 

 

대통령선거 다음 날인 19일 아침부터 주민센터마다 사람들이 몰린 이유, 이제 이해가 되시죠? 

 

증명서 발급은 국가에 짭짤한 수입이 됩니다. 발급비가 212 볼리비아노,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하면 3만5000원 정도 되니까요. 

 

하지만 투표를 하지 않고 신청만 한다고 누구나 증명서를 받을 수 있는 건 절대 아닙니다. 

 

아파서 투표를 못했거나 장거리 여행 중이었다면 이를 입증할 서류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의사가 도장을 꽉 찍어준 진단서, 여행 중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증빙서류(티켓 등)를 제출해야 한답니다. 

 

19일 주민센터를 찾은 사람 중 거짓말로 면죄부(?)를 받으려다 발걸음을 돌린 사람도 꽤 된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억울한 사연도 있습니다. 투표를 하려고 투표소를 찾아갔지만 유권자리스트에 이름이 없어 투표를 못한 사람들이 대표적인 경우죠. 

 

카오루 브루노(여)도 그런 경우였는데요. 그는 선거 당일 지정된 지역투표소를 찾아갔지만 유권자리스트에 이름이 누락된 바람에 투표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꼭 투표를 하려고 투표소 3곳을 전전했는데요. 걸어 다닌 거리만 장장 4km에 달했습니다. 그래도 결국 투표는 하지 못했지만요...  

 

브루노는 "친척 중 8년 전 돌아가신 이모 2분의 이름이 버젓이 유권자리스트에 올라 있었다"고 주장했는데요. 누군가 죽은 사람의 명의로 투표를 한 사실도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작 선거 관리는 엉망이면서 애꿎은 국민들만 고생을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투표를 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죽은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화가 날 만도 하지요...